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테오도어 모렐 (문단 편집) === 나치당 활동 === 모렐은 1933년에 [[나치당]]에 입당했다.[* 입당 계기도 딱히 나치에 동조해서가 아니라 그가 운영하던 병원이 테러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유대인이 운영하는 병원으로 오인당해 험악한 페인트 낙서가 벽을 뒤덮었다고…보신책으로 입당한 셈.] 그 후 [[아돌프 히틀러]]의 사진사인 하인리히 호프만을 치료해주면서 인맥을 쌓기 시작, 호프만과 [[에바 브라운]]에게 히틀러의 주치의 자리를 소개받는다. 당시 히틀러는 피부 발진과 위장 가스로 고생하고 있었는데 모렐은 여러 의약품을 조합하여 히틀러를 치료하는 데에 성공했다. 모렐은 이때 얻은 신임을 바탕으로 해, 1936년 12월 31일 히틀러의 공식적인 주치의로 임명되었다. 대다수의 나치 지도자들은 그를 높게 평가했으나, [[헤르만 괴링]]과 [[하인리히 힘러]]는 그가 돌팔이임을 직감했다고 한다. 괴링이 당시 이미 [[모르핀]]에 찌든 약물중독자가 되어서 한창 정신나간 짓거리들을 하고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간파했다. 어찌 보면 자신이 마약을 하고 있으니 역설적으로 모렐의 처방이 사짜라는걸 간파한 것일 수도 있다. 그 때문인지 모렐이 계급을 희망했음에도 히틀러는 끝끝내 그에게 군 계급을 수여하지 않았다.[* 다만 이는 모렐에게 명예욕이 있어서가 아니라, 주치의 자리를 놓고 카를 브란트와 경쟁하던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계급을 받아 공식적으로 지위를 인정받고 싶어했으나 군을 불신하고 있던 히틀러는 그를 특정 조직에 소속되게 두지 않고 자신의 직속으로 삼는 편을 택했다.] 궁여지책으로 녹색으로 제복 비슷한 걸 만들어 입고 다녔지만 비웃음만 샀다고. 한편 후술할 비정상적인 처방전들과는 달리 제대로 된 처방을 내린 적도 있다. 그 예로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체코에서 영국 공작원에게 피습당해 심한 [[패혈증]]으로 중태에 빠지자, 모렐은 당시 독일에서 개발한 [[항생제]]인 [[설파제|술폰아미드]]의 처방을 권했다. 당시 독일에선 [[페니실린]]을 구할 수 없어서 대체제로 술폰아미드를 택한 것이다. 전쟁중이라 수입도 불가능한 데다 당시에는 기술의 미비로 페니실린의 개발지인 영국 본토에서도 페니실린은 구하기 힘들었다. [[2017년 판문점 귀순 북한군 총격 사건|현재에도 패혈증이 확실한 중환자에게 각종 항생제를 때려부어 수술을 진행하고 경과를 지켜보는 만큼]], 이 처방 자체는 의외겠지만 흠잡을 데가 없는 합리적인 처방이었다. 하지만 하이드리히의 치료를 맡았던 [[카를 게프하르트]]는 이 처방을 무시했고, 결국 하이드리히는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하이드리히를 껄끄럽게 여긴 힘러가 의사들을 매수해서 하이드리히를 암살했다는 의혹이 있다.[* 마침 카를 게프하르트는 힘러의 주치의이며 이후로도 각종 범죄 행각으로 악명이 높았다.] 모렐은 이후 친위대 출신의 다른 주치의인 [[카를 브란트]]와 경쟁했는데, 히틀러는 모렐의 편을 자주 들어주었다. 얼마나 심했냐면 1944년 10월 5일에 카를 브란트가 모렐의 약 처방에 반대하는 의견서를 내자 히틀러는 이 의견서를 보고 역으로 카를 브란트를 신뢰하지 않게 되었을 정도였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카를은 아예 총통부 의사직에서 해임당하게 되었고, 전후 [[T4 작전|나치의 장애인 절멸 계획]]에 동참하며 온갖 비인도적인 [[인체실험]]을 한 혐의로 처형된다. 이렇게 모렐은 히틀러 옆에서 치료 활동을 했고, 1944년에 7월에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당시에도 모렐은 각종 약을 써서 히틀러의 기운을 차리게 했다. 암살 사건 이후 히틀러는 여동생 파울라 같은 일부를 제외하고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의심[* 나치 초기부터 동고동락한 괴링·힘러 등의 측근들이 아니라 권력 서열의 저 아래에 있었던 [[해군]] [[원수(계급)|원수]] [[카를 되니츠]] [[제독]]을 자신의 후계자로 선정했을 정도다. 힘러와 괴링 둘 다 이미 히틀러의 눈 밖에 났고, 괴벨스·보어만·카이텔 등의 측근은 히틀러와 함께 베를린에 남아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후계자로 삼아봐야 며칠 내로 소련군에 잡히거나 죽어 지휘를 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했는데, 모렐도 의심받지 않은 예외 중 한 명이었다. 최측근인 괴링이나 힘러같은 인물도 이미 히틀러에게 반역에 가까운 행동을 한 상황에서, 정치적 욕심을 일절 보이지 않고 자기 건강만을 충실히 책임지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히틀러가 최후를 맞이하기 전까지 벙커에 있던 모렐이지만 언제까지 있었는지는 서술이 엇갈린다. [[이언 커쇼]]의 책에서는 모렐이 결국 히틀러의 분노를 사 도망쳤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1945년 4월 21일 모렐은 서재에 있던 히틀러가 기운 없이 풀이 죽어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래서 모렐은 인체에 무해한 포도당 주사를 히틀러에게 놓으려 했지만, 히틀러는 갑자기 화를 내면서 자신을 모르핀으로 중독시킬 셈이냐며 펄펄 뛰었다. 그러면서 장군들이 자기한테 약을 먹여서 베르히테스가덴으로 실어 가고 싶어하는지 자기도 안다고 했다. "자네는 나를 미치광이 취급하는 건가?" 하고 고함을 질렀다. 모렐이 히틀러에게 처방한 약이 객관적인 효과는 몰라도 심적으로는 큰 의지가 되었던 모양인데, 히틀러는 결국 그렇게 의지했던 모렐을 이제는 쏴 죽이겠다고 위협했고, 모렐은 벌벌 떨면서 도망갔다고 한다.[* 이언 커쇼 히틀러 2권 17장 불타는 제국 977페이지] 전쟁 후반부에 모렐의 역할은 사실상 오이코달, 메스암페타민, 모르핀 등을 주사하여 패전 직전 궁지의 몰린 히틀러의 기분을 풀어주는 것이었으나 연합국의 폭격으로 이러한 약물들의 공급이 끊기고 모렐이 노환으로 주사조차 제대로 놓지 못하는 신세가 되자 필요가 없어져 내쳤다는 해석도 있다. 화를 내며 총으로 위협해 쫓아냈다는 내용은 위와 동일하다.[* 노르만 올러 저, 마약 중독과 전쟁의 시대] 반면 요아힘 C. 페스트가 쓴 히틀러 평전에 의하면 1945년 4월 20일 히틀러는 [[자살|이제 그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된다]]며 모렐을 총통 방공호에서 내보냈다고 하며, 여러 기록을 종합해 봤을 때 모렐이 히틀러의 허락을 받아 베를린을 떠났다는 것은 확실하다. 히틀러의 경호원이었던 하인츠 링게의 회고에 따르면, 베를린 전투가 한창일 때 모렐이 울면서 히틀러를 찾아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겠다고 말하자 히틀러가 모렐을 위로하며 베를린을 떠날 수 있게 해주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